헨리크 입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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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크 입센은 1828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1906년에 사망한 근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극작가이다. 개인의 자유, 사회적 위선, 여성 문제 등을 다룬 사실주의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작품을 통해 세계 연극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인형의 집》, 《유령》, 《페르 귄트》, 《헤다 가블러》 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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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입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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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헨리크 입센 |
본명 | 헨리크 요한 입센 |
출생일 | 1828년 3월 20일 |
출생지 | 스키엔, 텔레마르크, 노르웨이 |
사망일 | 1906년 5월 23일 |
사망지 | 크리스티아니아, 노르웨이 (현대 오슬로) |
묘지 | ヴォル・フレールセル스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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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
직업 | 극작가, 시인, 무대 감독 |
활동 시기 | 1848년 - 1899년 |
장르 | 자연주의 연극 리얼리즘 연극 |
작품 | |
주요 작품 | 브란 (1865) 페르 귄트 (1867) 인형의 집 (1879) 유령 (1881) 민중의 적 (1882) 들오리 (1884) 로스메르스홀름 (1886) 헤다 가블레르 (1890) |
데뷔 작품 | 카틸리나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수잔나 토레센 (결혼 1858년) |
자녀 | 시구르 입센 (장남, 외교관) |
친척 | 크누드 입센 (아버지) 마리첸 알텐부르크 (어머니) |
영향 | |
영향 받은 인물 | 키르케고르 브란데스 야콥센 스트린드베리 |
영향을 준 인물 | 체호프 스타니슬랍스키 조지 버나드 쇼 브란데스 앙드레 앙투안 오렐리앙 뤼니에-포 프로이트 조이스 밀러 윌리엄스 사티야지트 레이 스트린드베리 |
기타 | |
사용 언어 | 덴마크-노르웨이어 (리크스몰, 이후 부크몰) |
초기 필명 | 브리뇰프 비얄메 |
2. 생애
헨리크 입센은 1828년 3월 20일 노르웨이 남부 항구 도시 스키엔의 스톡만가르덴에서 상인 크누트 입센과 마리켄 알텐부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18] 입센 가문은 16세기 중반부터 텔레마르크주 지역의 유력 가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주로 상인, 선주, 관료 귀족 등으로 구성되었다.[18] 그는 3월 28일 가정에서 노르웨이 교회의 루터교 성례전에 따라 세례를 받았다.[18]
입센의 부모는 올레 파우스와 헤데비히 파우스 남매를 중심으로 얽혀 있는 파우스 가문에 속한 가까운 친척 관계였다.[18] 1797년 입센의 아버지 헨리히 요한 입센이 사망한 후, 그의 어머니는 올레 파우스와 재혼했다.
입센의 어머니 마리헨은 요한 안드레아스 알텐부르크와 헤데비히 파우스 부부와 함께 시엔 중심부의 알텐부르크가르덴에서 자랐다.
1825년, 입센의 아버지 크누드는 독립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크누드는 마리헨과 결혼했고, 1828년 헨리크가 태어났다. 1830년, 마리헨의 어머니는 알텐부르가르덴과 재산을 크누드에게 남겼고, 입센 가족은 1831년 마리헨의 어린 시절 집으로 이사했다. 1820년대와 1830년대에 크누드는 스키엔에서 부유한 젊은 상인이었다.[18]
입센은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 스키엔에 대해 "매우 즐겁고 축제 분위기가 넘치는 도시"였다고 회고했다.[19]
입센이 일곱 살 무렵, 아버지의 재산이 악화되었고, 1835년 가족은 알텐부르가르덴을 팔아야 했다. 이듬해 그들은 도시 외곽의 별장이자 농장인 Venstøpno로 이사했다.[21] 1843년 입센이 집을 떠난 후, 입센 가족은 크리스토퍼 블롬 파우스 소유의 스니페토르프에 있는 도시집으로 이사했다.[23]
입센 가문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 남아있는 인물은 덴마크 스테게 출신의 선장 라스무스 입센(1632~1703)이다. 그의 아들인 선장 페데르 입센은 1726년 노르웨이 베르겐의 시민이 되었다.[64] 헨리크 입센은 덴마크, 독일, 노르웨이 혈통을 가지고 있었고, 약간의 스코틀랜드 혈통도 있었다.
15세에 헨리크 입센은 학교를 그만두고 그림스타라는 작은 마을로 가서 약제사 견습생이 되었다. 이때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29] 1846년에는 엘세 소피 옌스다터 비르케달렌과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다.[29] 이후 오슬로(당시 크리스티아니아)로 가서 대학에 입학하려 했으나,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좌절되었고, 글쓰기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29]
20세 겨울, 입센은 브리뇰프 비야르메라는 필명으로 첫 희곡 카틸리나(1850)를 자비로 출판했다.[29] 같은 해에 쓴 1막 작품 무덤은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상연되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29]
1851년 가을, 베르겐의 국민극장에 무대감독 겸 극작가로 초빙되어 6년간 극작가 수업 시대를 보냈다. 매년 1월 2일 극장 기념일에 상연할 신작을 써야 했으며,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외스트로트의 잉게르 부인》(1854)이 있다.
베르겐 노르웨이 극장(Det norske Theater (Bergen))에서 작가, 연출가, 제작자로 활동하며 145편 이상의 희곡 제작에 참여했다.
1858년, 입센은 수잔 토레센과 결혼하여 이듬해 외아들 시구르를 얻었다.[18]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면서, 1864년 4월 입센은 이탈리아로 망명길에 올랐다.[18] 이후 27년간 그는 몇 차례의 짧은 귀향 기간을 제외하고는 노르웨이에 돌아가지 않았다.[18]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에 머무르며 극작에 전념했다.[18]
이탈리아 망명 시기에 발표한 극시 《브랜드》(1866)는 덴마크-프로이센 전쟁에 대한 노르웨이 국민의 배신행위를 비난하며 청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31] 1867년에 발표된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 민화를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문제를 풍자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31]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에게 자극받은 입센은 1877년 《사회의 기둥(Samfundets Støtter)》을 발표하며 현대 사회극으로 전환했다.[33] 《인형의 집(Et Dukkehjem, 1879)》, 《유령(Gengangere, 1881)》, 《민중의 적(En Folkefiende, 1882)》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 문제극은 입센을 유럽 연극의 중심에 놓이게 했다.
1880년대 후반부터 입센의 작품은 사회 비판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심리적 갈등과 상징주의적 요소가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물오리》(1884)는 이러한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로스메르스홀름》(1886),《바다의 부인》(1888), 《헤다 가블러》(1890) 역시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30]
1891년, 오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돌아온 입센은 《건축가 솔네스》(1892)를 발표했다. 《조그만 에이올프》(1894),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1896)을 거쳐 마지막 작품인 《우리들 사자(死者)가 눈뜰 때》(1899)는 입센의 일생을 결론짓는 심각한 분위기를 지닌 희곡이다.[30]
19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투병 생활을 하던 헨리크 입센은 1906년 5월 23일, 당시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43] 간호사가 방문객에게 그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고 말했을 때, 입센은 마지막 말로 "전혀 아니다"("Tvertimod!")라고 중얼거렸다.[44] 그는 다음 날 오후 2시 30분에 사망했다.[44]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오슬로 중심부의 구세주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가족 배경
헨리크 입센은 1828년 3월 20일 노르웨이 남부 항구 도시 스키엔의 스톡만가르덴에서 상인 크누트 입센과 마리켄 알텐부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18] 입센 가문은 파우스 가문을 중심으로 16세기 중반부터 텔레마르크주 지역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가문들과 긴밀한 가족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주로 상인, 선주, 관료 귀족 등으로 구성되었다.[18] 입센은 "나의 부모는 스키엔에서 가장 존경받는 가문 양쪽의 일원이었으며, 당시 그곳과 그 주변을 지배했던 거의 모든 노르웨이 귀족 가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회고했다.[14][15] 그는 3월 28일 가정에서 노르웨이 교회의 루터교 성례전에 따라 세례를 받았고, 6월 19일 크리스티안 교회(스키엔)에서 세례가 확인되었다.[18]입센의 부모는 올레 파우스와 헤데비히 파우스 남매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파우스 가문에 속한 가까운 친척 관계였다.[18] 1797년 입센의 아버지 헨리히 요한 입센이 사망한 후, 그의 어머니는 올레 파우스와 재혼했다. 올레 파우스는 입센 가옥을 매각하고 라이징 영지를 매입했으며, 크누트는 이복형제들과 함께 라이징에서 성장했다.[18]
입센의 어머니 마리헨은 요한 안드레아스 알텐부르크와 헤데비히 파우스 부부와 함께 시엔 중심부의 알텐부르크가르덴에서 자랐다. 알텐부르크는 선주이자 목재 상인이었으며, 1824년 사망 후 헤데비히가 사업을 인수했다.[18] 올레와 헤데비히 파우스 남매는 상텔레마르크의 라르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시엔으로 이주하여 친척들의 지원을 받아 상인 엘리트에 합류했다. 이들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크누트와 마리헨의 어린 시절 내내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8]
1825년, 입센의 아버지 크누드는 스키엔 시의 시민권을 얻고 독립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사촌인 디데리크 폰 카펠렌과 협력하여 목재 수출 도매업도 했다. 같은 해 크누드는 마리헨과 결혼했고, 1828년 헨리크가 태어났다. 1830년, 마리헨의 어머니 헤데비그는 알텐부르가르덴과 재산을 크누드에게 남겼고, 입센 가족은 1831년 마리헨의 어린 시절 집으로 이사했다. 1820년대와 1830년대에 크누드는 스키엔에서 부유한 젊은 상인이었으며, 1833년에는 도시에서 16번째로 세금을 많이 낸 사람이었다.[18]
이전 연구자들은 입센이 부모의 "이상하고 거의 근친상간에 가까운 결혼"에 매료되었으며, 그의 작품, 특히 로스메르스홀름에서 근친상간 관계를 다룬다고 주장했다.[17] 그러나 외르겐 하아베는 부모의 가까운 관계가 스키엔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18]
입센은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 스키엔에 대해 "매우 즐겁고 축제 분위기가 넘치는 도시"였으며, "많은 고학력이고 부유한 가정들이 도시 자체에, 그리고 인근 대농장에 부분적으로 거주"했고, "이 가족들 대부분은 가까운 친척이나 먼 친척 관계로 맺어져 있었고, 겨울과 여름 모두 무도회, 만찬, 음악회가 잇달아 열렸"다고 회고했다.[19]
하아베는 입센의 어린 시절을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을 인용하며 그를 "아버지에게 응석받이로 자란, 고독 속에서 창작 활동을 즐기고, 자신의 우월함과 오만함으로 또래들을 자극하는 소년"이었다고 묘사한다.[18] 그는 모형극에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부르주아 가정 출신 소년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활동이었다.[18] 아버지와는 달리, 입센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묘사되며, 이는 파우스 가문의 여러 친척들과 그의 아들 시구르드 입센에게서도 나타났다.[63]
입센이 일곱 살 무렵, 아버지의 재산이 악화되었고, 1835년 가족은 알텐부르가르덴을 팔아야 했다. 이듬해 그들은 도시 외곽의 별장이자 농장인 Venstøpno로 이사했다.[21] 그들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부유했고, 하인 네 명을 두었으며,[22] 사치스러운 파티를 통해 스키엔 엘리트들과 교류했다. 1843년 입센이 집을 떠난 후, 입센 가족은 크리스토퍼 블롬 파우스 소유의 스니페토르프에 있는 도시집으로 이사했다.[23] 크누드는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고군분투했고 1840년대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1850년대에 그의 사업과 직업 활동은 끝났고, 성공한 그의 어린 이복형제들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18]
현대 학문은 입센을 역경 속에서 일어선 자수성가한 예술가가 아니라, 노르웨이 귀족 엘리트의 산물로 규정한다. 입센 학자 엘렌 리스는 21세기 입센의 삶에 대한 연구가 이전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많은 신화들을 폭로하는 "혁명"으로 특징지어졌다고 지적한다.[24] 욘 뉘가르드와 외르겐 하아베는 이전의 전기 작품들이 입센의 부모와 유년기, 배경에 대해 근거 없는 신화를 반복했다고 비판했다.[25][18]
하아베는 1830년대 크누트 입센의 경제적 문제가 어려운 시대의 결과였고, 입센 가족이 대부분의 부르주아 구성원들과 공통적으로 겪었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입센이 가족이 Venstøpno로 이사한 후에도 상류층 구성원으로서 행복하고 편안한 유년기를 보냈고, 확대 가족과 축적된 문화 자본의 도움으로 그들의 생활 방식과 귀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18]
리스는 입센의 가족을 중산층이 아닌 상류층으로 규정하며, "노르웨이가 가진 것 중 가장 귀족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그의 생애 동안 대부분의 권력을 잃은 존재"의 일부라고 말한다.[24] 욘 뉘가르드는 입센이 "특출한 상류층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16] 하아베는 입센의 조상 거의 모두가 부유한 부르주아와 고위 정부 관리였고, 그들이 살았던 지역의 지역 엘리트의 구성원이었으며, 종종 유럽 대륙계 혈통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입센 가족은 일반 농민 인구와 강하게 거리를 두고 자신을 교육받은 유럽 문화의 일부로 여기는 엘리트에 속했다"고 주장하며, "바로 이 귀족 계급이 그의 문화적 정체성과 양육을 형성했다"고 말한다.[26]
입센의 혈통은 그의 외국인으로 여겨지는 인식[63]과 그의 전기와 가족이 그의 희곡에 미친 영향 때문에 오랫동안 연구되어 온 주제이다. 입센은 종종 그의 희곡에서 가족을 언급했는데, 때로는 이름으로, 때로는 그들을 모델로 한 등장인물을 통해서였다.
입센 가문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 남아있는 인물은 덴마크 스테게 출신의 선장 라스무스 입센(1632~1703)이다. 그의 아들인 선장 페데르 입센은 1726년 노르웨이 베르겐의 시민이 되었다.[64] 헨리크 입센은 덴마크, 독일, 노르웨이 혈통을 가지고 있었고, 약간의 스코틀랜드 혈통도 있었다. 그의 조상 대부분은 원래 덴마크와 독일 출신의 상인 계급에 속했으며, 많은 조상들이 선장이었다.
입센의 전기 작가 헨리크 예거는 1888년에 입센에게는 노르웨이 피 한 방울도 없다며 "입센 가문의 조상은 덴마크인이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정확하지 않다. 특히 그의 할머니 헤데비그 파우스를 통해 입센은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 중 하나로 여겨지는 파우스 가문의 후손이었다. 많은 조상들이 외국 혈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입센의 조상들은 대부분 수 세대 동안 노르웨이에 살았다.[65][66]
입센이라는 이름은 원래 파트로니믹으로, "Ib의 아들"을 의미한다 (Ib는 야곱의 덴마크 변형이다). 파트로니믹은 17세기에 "고정", 즉 영구적인 성이 되었다.
2. 2. 초기 경력과 글쓰기
15세에 헨리크 입센은 학교를 그만두고 그림스타라는 작은 마을로 가서 약제사 견습생이 되었다. 이때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29] 1846년에는 엘세 소피 옌스다터 비르케달렌과 관계를 맺어 아들 한스 야곱 헨드리크센 비르크달렌을 낳았고, 14세가 될 때까지 양육비를 지원했지만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29] 이후 오슬로(당시 크리스티아니아)로 가서 대학에 입학하려 했으나,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좌절되었고, 글쓰기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29]20세 겨울, 입센은 브리뇰프 비야르메라는 필명으로 첫 희곡 카틸리나(1850)를 자비로 출판했다.[29] 이 작품은 고대 로마의 카틸리나를 소재로 한 시극으로, 1848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두 여성에게 이끌리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다루고 있다. 같은 해에 쓴 1막 작품 무덤은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상연되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29] 초기 입센의 주요 영감은 헨리크 베르겔란과 페터 크리스텐 아스비외르센과 외르겐 모가 수집한 노르웨이 민담이었다.
크리스티아니아의 예비학교에 다녔으나 학업을 중단한 입센은, 저널리스트 활동과 조합 운동에 참여하며 사회에 대한 소외감을 드러냈다. 이후 정치적 실제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851년 가을, 베르겐의 국민극장에 무대감독 겸 극작가로 초빙되어 6년간 극작가 수업 시대를 보냈다. 매년 1월 2일 극장 기념일에 상연할 신작을 써야 했으며,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외스트로트의 잉게르 부인》(1854)이 있다. 이 작품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스크리브 일파의 구성 수법을 답습하면서 여주인공의 가명(家名)에 대한 집념을 묘사하여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솔하우그의 축제》(1855) 등은 덴마크 낭만파적인 사극이었다.
이 시기 덴마크, 독일 등지를 여행하며 연극 연수를 받았다. 무대감독으로서는 큰 명성을 얻지 못했지만, 극장 일을 통해 얻은 경험은 훗날 극작의 기술적인 면에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에 아이슬란드 사가의 세계를 접하고, 크리스티아니아에서 《헬게란의 용사들》(1857)을 썼다.
베르겐 노르웨이 극장(Det norske Theater (Bergen))에서 작가, 연출가, 제작자로 활동하며 145편 이상의 희곡 제작에 참여했다. 이 기간 동안 다섯 편의 새로운 희곡을 발표했지만, 대부분 주목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2. 3. 결혼과 망명 생활
1858년, 입센은 수잔 토레센과 결혼하여 이듬해 외아들 시구르를 얻었다.[18] 수잔은 입센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 시기에 쓰인 《헬겔란트의 해적》(1858)과 《사랑의 희극》(1862)의 여주인공은 그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8]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면서, 1864년 4월 입센은 이탈리아로 망명길에 올랐다.[18] 이후 27년간 그는 몇 차례의 짧은 귀향 기간을 제외하고는 노르웨이에 돌아가지 않았다.[18]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에 머무르며 극작에 전념했다.[18]이탈리아 망명 시기에 발표한 극시 《브랜드》(1866)는 덴마크-프로이센 전쟁에 대한 노르웨이 국민의 배신행위를 비난하며 청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31] 이 작품으로 입센은 노르웨이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올랐으며,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다.[31]
1867년에 발표된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 민화를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문제를 풍자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31]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시가 아니라고 비난했지만, 입센은 이 작품이야말로 앞으로 노르웨이 시의 기준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으며, 실제로 오늘날 노르웨이 문학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31] 《페르귄트》는 에드바르트 그리그의 음악과 함께 1876년에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31]
2. 4. 현대 사회극으로의 전환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에게 자극받은 입센은 1877년 《사회의 기둥(Samfundets Støtter)》을 발표하며 현대 사회극으로 전환했다.[33] 그는 외국에서 고향 시민사회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인간 정신의 반항'을 목표로 개인 해방을 추구하며 사회를 비판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독일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소개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87]《인형의 집(Et Dukkehjem, 1879)》, 《유령(Gengangere, 1881)》, 《민중의 적(En Folkefiende, 1882)》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 문제극은 입센을 유럽 연극의 중심에 놓이게 했다. 다윈과 졸라의 영향을 받은 급진적 작가로 평가받는 그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혼란스럽던 프랑스 파리에서 《민중의 적》 공연 중 관객 난투극으로 공연이 취소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87]
2. 5. 후기 작품과 상징주의적 경향
1880년대 후반부터 입센의 작품은 사회 비판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심리적 갈등과 상징주의적 요소가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물오리》(1884)는 이러한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사회사상은 차츰 예리함을 잃고 내면적, 회의적, 자조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표현은 점차 명확성을 잃고 상징적으로 변했으며, 잠재의식의 암류가 끊임없이 울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30]《로스메르스홀름》(1886)은 정치 투쟁을 줄거리로 삼았지만, 주제는 남녀 간의 심리적 상극이었다. 《바다의 부인》(1888), 《헤다 가블러》(1890) 역시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30]
1891년, 오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돌아온 입센은 《건축가 솔네스》(1892)를 발표했다. 이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노(老)예술가의 만년에 볼 수 있는 자기 고백극으로, 제3기의 시초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입센의 작품은 상징주의적인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30]
《조그만 에이올프》(1894),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1896)을 거쳐 마지막 작품인 《우리들 사자(死者)가 눈뜰 때》(1899)는 입센의 일생을 결론짓는 심각한 분위기를 지닌 희곡이다.[30]
후기 작품에서 입센은 사회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나 개인의 문제와 심리적 갈등에 더 집중했다. 《헤다 가블러》와 《건축가》(1892)와 같은 작품들은 단순한 관습의 거부를 넘어, 인간관계의 대립을 날카롭고 객관적으로 고찰하여 현대 독자들에게도 큰 공감을 얻고 있다.[39]
2. 6. 별세
19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투병 생활을 하던 헨리크 입센은 1906년 5월 23일, 당시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43] 간호사가 방문객에게 그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고 말했을 때, 입센은 마지막 말로 "전혀 아니다"("Tvertimod!")라고 중얼거렸다.[44] 그는 다음 날 오후 2시 30분에 사망했다.[44]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오슬로 중심부의 구세주 묘지에 안장되었다.3. 작품 세계
헨리크 입센은 근대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극작가로, 그의 사상과 극작 기법은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는다. 입센의 희곡은 줄거리가 전개되면서 과거 사건의 베일이 점차 벗겨지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독백 없이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배경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희곡은 단순한 기교의 산물이 아니라, 다원적인 인간 내면의 대립 요소 간의 대화와 갈등을 통해 내적 필연성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입센은 사실주의 극작가나 사회문제 극작가로만 규정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시기로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모든 작품이 이러한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포함하며 발전했다. 입센은 자신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읽기를 바랐다. 오늘날 그의 사상이 낡았다는 평가도 있지만, 극작법의 정교함뿐만 아니라 그가 발전시킨 독자적이면서도 전통적인 극적 요소를 재평가해야 할 시기이다.
3. 1. 주요 주제와 특징
입센의 작품 세계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사회의 위선과 억압, 여성 문제, 진실과 허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사회적 관습과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 본성과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입센의 희곡은 사실주의적 기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상징과 은유를 통해 인간 내면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특징을 지닌다.[18] 그의 작품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면서도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을 다루고 있어 시대를 초월한 공감을 얻고 있다.
근대극에서 입센의 사상적, 극작 기법적 영향은 매우 컸다. 그의 작품은 줄거리가 전개됨에 따라 과거 사건들의 베일이 점차 벗겨지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독백은 전혀 사용되지 않으며, 대화 속 미묘한 구절들을 통해 배경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입센은 단순한 사실주의 작가나 사회 문제 극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크게 낭만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시기로 나눌 수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작품이 이러한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포함하며 발전해 왔다. 입센은 자신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읽기를 바랐다.
오늘날에는 그의 사상이 낡았다는 평가도 있지만, 극작법의 정교함이나 다른 작품에 미친 영향뿐만 아니라, 입센이 발전시킨 독자적이면서도 전통적인 극적 요소를 재평가해야 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 2. 극작 기법
입센은 근대극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극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줄거리가 전개되면서 과거의 사건들이 점차 밝혀지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독백은 전혀 사용되지 않고,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배경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1]그러나 입센의 희곡은 단순한 기교의 산물이 아니라, 다원적인 인간 내면의 여러 대립 요소 간의 대화와 갈등을 통해 내적 필연성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입센은 사실주의, 낭만주의, 상징주의 등 여러 요소를 작품에 포함시키면서 발전해 왔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읽기를 바랐다.[1]
3. 3. 문체와 언어
입센은 덴마크어를 바탕으로 노르웨이어 요소를 가미한 리크스몰(후에 북몰)로 작품을 썼다.[80][81][82][83][84] 19세기까지 노르웨이에서는 종주국의 언어인 덴마크어가 문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81] 언어학자 크누트 크누츠는 19세기 후반에 문어를 점차 노르웨이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제안했고, 이 언어는 후에 리크스몰, 그리고 북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83] 그의 문체는 간결하고 명확하며,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깊은 의미를 담아내는 특징을 지닌다. 21세기에 사용되는 노르웨이어와는 크게 달라, 노르웨이에서 공연될 때는 현대 관객을 위해 텍스트를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85]4. 영향
입센은 근대극의 아버지로서 세계 연극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실주의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은 당대 연극의 흐름을 바꾸었으며, 조지 버나드 쇼, 안톤 체호프, 유진 오닐 등 많은 극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39] 그는 리얼리즘으로 극의 규칙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데, 이는 체호프 등이 채택했고 오늘날에도 극장에서 볼 수 있다. 입센 이후 가정에 도전하고 문제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희곡을 오락이 아닌 예술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40]
입센의 희곡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정생활과 예절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적 가치관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에 대한 도전은 부도덕하고 비상식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입센은 주로 현대극을 바탕으로 생활 환경과 도덕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의문을 제시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연극에서는 선이 행복을, 부도덕이 고통을 가져온다는 도덕적 결말이 당연했지만, 입센은 이러한 통념과 환상을 깨뜨렸다.
일본의 신극 운동은 입센 희곡 상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참고: 시가와 사단지(2대), 문예협회).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86]는 당시 "새로운 여성"으로 여겨졌다. 중국에서도 『신청년』 제4권 6호(1918년 6월)가 입센 특집을 다루는 등, 5·4 운동기에 열광적으로 소개되어 여성 해방 운동과 화극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2007년에는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국제 입센 상이 제정되었다.
4. 1. 세계 연극계에 미친 영향
입센은 근대극의 아버지로서 세계 연극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실주의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은 당대 연극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으며, 이후 등장한 조지 버나드 쇼, 안톤 체호프, 유진 오닐 등 많은 극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39] 그는 리얼리즘으로 극의 규칙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데, 이는 체호프 등이 채택했고 오늘날에도 극장에서 볼 수 있다. 입센 이후로 가정에 도전하고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희곡을 오락이 아닌 예술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40]입센의 희곡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이라고 여겨졌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정생활과 예절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적 가치관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에 대한 어떤 도전도 부도덕하고 비상식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입센은 주로 현대극을 바탕으로 생활 환경과 도덕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의문을 제시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연극에서는 악의 세력에 맞서는 고결한 주인공이 기대되었고, 모든 희곡은 선이 행복을 가져오고 부도덕은 고통만 가져온다는 도덕적으로 적절한 결말로 끝났다. 입센은 이러한 생각과 당시의 신념에 도전하여 관객들의 환상을 깨뜨렸다.
일본의 신극 운동은 입센 희곡의 상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참고: 시가와 사단지(2대), 문예협회).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노라[86])는 당시 "새로운 여성"으로 여겨졌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연극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에서도 『신청년』 제4권 6호(1918년 6월)가 입센 특집을 다루는 등, 5·4 운동기에 열광적으로 소개되어 여성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화극의 형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2007년에는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국제 입센 상이 제정되었다.
4. 2. 한국 연극계에 미친 영향
한국에서 헨리크 입센의 작품은 일제강점기 신극 운동을 통해 소개되면서 연극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86] 특히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신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여성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입센의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은 당시 한국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현진건, 유치진 등 한국의 초기 극작가들은 입센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적 경향의 희곡을 창작했으며, 이는 한국 현대극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4. 3. 현대 사회에 미친 영향
입센의 작품은 여성 해방, 사회 개혁, 개인의 자유와 권리 등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 시대를 초월한 공감을 얻고 있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공연되고 연구되며,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67]입센의 희곡은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빅토리아 시대적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현대극을 통해 생활 환경과 도덕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연극에서는 선이 행복을, 부도덕이 고통을 가져온다는 도덕적 결말이 당연시되었지만, 입센은 이러한 통념과 환상을 깨뜨렸다.
일본의 신극 운동은 입센 희곡의 상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시가와 사단지(2대), 문예협회)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86]는 당시 "새로운 여성"으로 여겨졌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연극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에서도 『신청년』 제4권 6호(1918년 6월)가 입센 특집을 다루는 등, 5·4 운동기에 열광적으로 소개되어 여성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화극의 형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2007년에는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국제 입센 상이 제정되었다.
5. 비판과 논란
폴 존슨은 그의 저서 《지식인들》에서 입센의 허영심, 특히 의상과 상장, 메달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다.[88]
입센의 희곡, 특히 『인형의 집』과 『유령』은 당시 사회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리하르트 바그너를 제외하면 입센만큼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숭배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예술가는 없었다.[57] 『유령』 출간 후 입센은 "폭풍이 치는 동안 나는 많은 연구와 관찰을 했고, 앞으로의 글쓰기에 이를 활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58] 그의 다음 희곡인 『민중의 적』은 처음에 비평가들에 의해 『유령』에 대한 격렬한 비판에 대한 그의 반응으로 여겨졌다. 입센은 『유령』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줄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59]
입센은 자신의 희곡에 대한 비판적 반응을 읽고 비평가, 출판사, 연출가, 신문 편집자들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해석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종종 연출가에게 특정 역할에 적합한 배우에 대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60]
입센의 희곡은 처음에는 공연보다 낭독극으로 더 널리 읽혔다. 『유령』의 경우, 노르웨이 당국이 공연을 허가하기까지 20년이나 걸렸다. 『인형의 집』이 출판되었을 때는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의 모든 사교 모임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한 여주인은 자신의 사교 모임 초대장에 "입센 씨의 신작을 언급하지 않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라고 적어 놓을 정도였다.[61]
입센은 1902년, 1903년, 1904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다.[62]
6. 작품 목록
입센의 작품 목록은 크게 연극과 기타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연극 목록은 하위 섹션 "연극"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연극 외 작품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 노르마 또는 정치가의 사랑 (''Norma eller en Politikers Kjaerlighed'', 1851년): 8쪽 분량의 정치 풍자극으로, 노르웨이 의회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70][71][72]
- 시집 (1871년): 입센이 출판한 유일한 시집으로, 1862년에 쓰여진 테르예 비겐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서는 다음과 같다.
- 원치요미 역, 『입센 희곡 전집』(전5권), 미래사, 1989년
- 『입센의 편지』, 미래사, 1993년
- 모리 사야 역, 『입센 희곡 선집 현대극 전작품』, 도카이 대학 출판회, 1997년
- 【사사베 히로시의 연극 컬렉션】 A6판(문고본), 2008년
- 연극 기획 제작 회사 「메이저리그」 상연 대본
6. 1. 연극
발표 연도 | 제목 | 비고 |
---|---|---|
1850 | 카틸리나 (Catilina) | 브리뇰프 비아르메라는 필명으로 처음 출판, 운문v |
1850 | 매장터 (Kjæmpehøjen) | 전사의 무덤으로도 알려짐, 운문v |
1852 | 요한의 밤 (Sancthansnatten) | 서문만 운문이고 나머지는 산문v |
1854 | 외스트라트의 잉거 부인 (Fru Inger til Østeraad) | |
1855 | 솔하우그의 연회 (Gildet paa Solhaug) | 산문과 운문이 혼합v |
1856 | 올라프 릴리크란스 (Olaf Liljekrans) | 산문과 운문이 혼합v |
1858 | 헬겔란드의 바이킹 (Hærmændene paa Helgeland) | |
1862 | 사랑의 희극 (Kjærlighedens Komedie) | 운문v |
1863 | 왕위 계승자 (Kongs-Emnerne) | 주로 산문이며, 몇몇 대사는 운문v |
1866 | 브랜드 (Brand) | 운문v |
1867 | 페어 귄트 (Peer Gynt) | 운문v |
1869 | 청년 연맹 (De unges Forbund) | |
1873 | 황제와 갈릴레오 (Kejser og Galilæer) | |
1877 | 사회의 기둥 (Samfundets Støtter) | |
1879 | 인형의 집 (Et Dukkehjem) | |
1881 | 유령 (Gengangere) | |
1882 | 민중의 적 (En Folkefiende) | |
1884 | 야생오리 (Vildanden) | |
1886 | 로스메르스홀름 (Rosmersholm) | |
1888 | 바다에서 온 여인 (Fruen fra Havet) | |
1890 | 헤다 가블러 (Hedda Gabler) | |
1892 | 건축가 솔네스 (Bygmester Solness) | |
1894 | 작은 아이올프 (Lille Eyolf) | |
1896 | 존 가브리엘 보크만 (John Gabriel Borkman) | |
1899 | 우리가 죽은 자를 깨울 때 (Når vi døde vaagner) |
6. 2. 기타 작품
- 카틸리나 (''Catilina'', 1850년)
- 용사의 무덤 (''Kjæmpehøjen'', 1850년)
- 노르마 또는 정치가의 사랑 (''Norma eller en Politikers Kjaerlighed'', 1851년) - 8쪽 분량의 정치 풍자극[70][71][72]
- 성 요한 축제의 밤 (''Sancthansnatten'', 1852년)
- 외스테르뢰드의 인게르 부인 (''Fru Inger til Østeraad'', 1854년)
- 솔호우그의 연회 (''Gildet paa Solhoug'', 1855년)
- 올라프 릴레크랑스 (''Olaf Liljekrans'', 1856년)
- 헬겔란드의 용사들 (''Hærmændene paa Helgeland'', 1857년)
- 사랑의 희극 (''Kjærlighedens Komedie'', 1862년)
- 왕위 계승자들 (''Kongs-Emnerne'', 1863년)
- 브란트 (''Brand'', 1865년)
- 페르귄트 (''Peer Gynt'', 1867년)
- 청년 연맹 (''De unges Forbund'', 1869년)
- 황제와 갈릴레이 사람 (''Kejser og Galilæer'', 1873년)
- 사회의 기둥 (''Samfundets støtter'', 1877년)
- 인형의 집 (''Et dukkehjem'', 1879년)
- 유령 (''Gengangere'', 1881년)
- 민중의 적 (''En Folkefiende'', 1882년)
- 야생오리 (''Vildanden'', 1884년)
- 로스메르스홀름 (''Rosmersholm'', 1886년)
- 바다의 부인 (''Fruen fra havet'', 1888년)
- 헤다 가블러 (''Hedda Gabler'', 1890년)
- 건축가 솔네스 (''Bygmester Solness'', 1892년)
- 작은 에욜프 (''Lille Eyolf'', 1894년)
- 요한 가브리엘 보크만 (''John Gabriel Borkman'', 1896년)
- 우리 죽은 자가 깨어나면 (''Når vi døde vågner'', 1899년)
- 시집 (1871년) – 유일하게 출판된 시집으로, 《테르예 비겐》(1862년에 쓰여졌으나 1871년 《시집》에 수록됨)이 포함됨
6. 3. 한국어 번역서
- 원치요미 역 『입센 희곡 전집』(전5권), 미래사 1989년
- * 『입센의 편지』, 미래사, 1993년
- * 원역은 『야생오리』, 『인형의 집』, 『헤다 가블러』, 『유령』이 이와나미 문고에서 간행. 1996년
- 모리 사야 역 『입센 희곡 선집 현대극 전작품』, 도카이 대학 출판회, 1997년
- * 신판 『입센 현대극 상연 대본집』, 론소샤, 2014년
- * 모리 역은 『인형의 집』, 『헤다 가블러』, 『야생오리』가 2020년부터 론소샤에서 시리즈 간행
- 【사사베 히로시의 연극 컬렉션[http://www.majorleague.co.jp/shop/index.html]】 A6판(문고본), 2008년
- * 『야생오리』, 『작은 아이홀프』, 『로스메르스홀름』
- * 『존 가브리엘이라 불린 남자』, 『민중의 적』, 『헤다 가블러』 간행
- 연극 기획 제작 회사 「메이저리그」 [http://www.majorleague.co.jp/] 상연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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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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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로 돌아온 이영애 “연극에서의 이영애는 다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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